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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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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르세스 1세는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의 아들로, 293년부터 302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형제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하기 위해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나르세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여 영토를 잃고, 40여 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파이쿨리 비문과 나크셰 로스탐 부조를 통해 그의 업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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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세스 1세
기본 정보
나르세의 암각화
낙쉬에 로스탐에 있는 나르세의 암각화
칭호이란과 비이란의 왕중왕
출생 연도228년에서 233년 사이
사망 연도303년 (70–75세)
종교조로아스터교
정치
왕조사산 왕조
선대 왕샤푸르 1세
통치
아르메니아 왕 재위 기간271년 – 293년
이전 통치자호르미즈드 1세
샤한샤 재위 기간293년 – 303년
선임 통치자바흐람 3세
후임 통치자호르미즈드 2세
가족 관계
배우자샤푸르두크탁
자녀호르미즈드 2세
호르미즈드두크탁

2. 이름 및 배경

나르세(Narseh)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의 '*naryasa(n)ha-'에서 유래했으며, "남성들의 찬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이름은 파이쿨리 비문과 낙쉐로스탐 유적에서 중세 페르시아어로는 ''nrshy'', 파르티아어로는 ''nryshw''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어 기록으로는 ''Narsaiēs'' 또는 ''Narsaios''로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Narsēs''로 표기된다. 다른 언어 표기는 다음과 같다: Narseuslat; 시리아어 ܢܪܣܝ ''Nrsy''; نرسي|나르시ara ''Narsi''; 아르메니아어 ''Nerseh''; 콥트어 ''Narsaph'', ''Narseos''.

나르세는 사산 제국의 창건자인 할아버지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년~242년) 통치 기간 중인 228년에서 23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샤푸르 1세의 막내아들이다. 아버지 샤푸르 1세의 비문에 따르면, 나르세는 힌드, 사카스탄, 투란 등 제국 동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신드, 시스탄, 투란에 해당하며 바다에 이를 때까지의 광대한 영역이었다. 이는 사실상 옛 쿠샨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나르세는 이 시기 제국 동부 지역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귀한 마즈다 숭배자"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막내아들이었음에도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270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1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1년 만에 사망했다. 이후 나르세의 형인 바흐람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바흐람 1세는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본래 왕위 계승 후보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강력한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의 지지를 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나르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변경 지방 총독직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당시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끊임없는 분쟁 지역이었다. 나르세는 아르메니아 총독 시절 "아르미난 대왕"(''šāh Armenā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왕위 계승자가 사용하는 칭호였다. 이는 나르세가 여전히 바흐람 1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흐람 1세는 274년 9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바흐람 2세 역시 카르티르의 도움을 받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연이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나르세는 상당한 불만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흐람 2세 시대에 나르세는 사산 왕조 군주에게만 허용되던 화폐 발행권을 깨고, 자신의 이름과 초상을 새긴 화폐를 독자적으로 발행하여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나르세는 생애 동안 여러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는 동시대 기록, 비문, 동전 등에서 확인된다.


  • 힌드, 사카스탄, 투란 총독: ''ēr mazdēsn Narseh, šāh Hind, Sagestān ud Turestān tā drayā damb'' ("이란인, 마즈다를 숭배하는 나르세, 힌드(스탄), 사게스탄, 투란의 왕, 해안까지").
  • 아르메니아 총독: ''šāh Armenān'' ("아르메니아의 왕").
  • 이란의 샤한샤: "이것은 마즈다를 숭배하는 신 나르세의 형상이며, 에란과 아네란의 왕 중 왕이며, 그의 씨앗은 신으로부터 나왔다" (ptkly ZNH mzdysn bgy nlsḥy MLKʾn MLKʾ ʾyrʾn W ʾnyrʾn MNW ctry MN yzdʾn) - 형 바흐람 1세의 비문 문구를 수정하여 사용.
  • 파이쿨리 집회에서 받은 칭호 추정: ''Narseh ī Abzūdxwarrah'' ("나르세, 그의 크와르라가 만개한").


훗날 나르세는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바빌로니아로 이동하여 동맹을 맺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파이쿨리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당시 나르세를 지지했던 인물들의 목록이 새겨져 있는데, 변방 지역의 왕들이 대부분이고 왕가의 주요 인물이나 명문 귀족 가문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카르티르를 포함한 주요 세력들이 이 시점에서 바흐람 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음을 시사한다.

3. 정권 탈취

샤푸르 1세의 막내아들인 나르세스는 형 호르미즈드 1세 사후, 강력한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형 바흐람 1세에게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 나르세스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중요한 변경 주인 아르메니아 총독직을 받았고, 왕위 계승자가 사용하는 "아르미난 대왕" 칭호를 얻었다. 그럼에도 나르세스는 바흐람 1세를 찬탈자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274년 바흐람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카르티르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자, 나르세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는 사산 왕조 군주에게만 허용된 화폐 발행권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름과 초상을 새긴 화폐를 독자적으로 발행하며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293년 바흐람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흐람 3세는 파르스의 귀족 와남과 메샨 총독 아두르파로바이 등의 지지로 마지못해 샤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바흐람 3세를 약한 통치자로 여겼고, 샤푸르 1세의 마지막 생존 아들이자 더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받던 나르세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정했다. 귀족들은 나르세스가 이란에 영광을 가져다줄 인물이라고 믿었다.[1][2] 나르세스를 지지한 이유로는 그의 총독으로서의 경험, 조로아스터교 옹호자로서의 이미지, 제국의 화합과 번영을 가져올 인물이라는 기대감, 그리고 초기 사산 왕조 혈통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의 요청으로 나르세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소환되어 가르메칸 지방의 파이쿨리 통로에서 지지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확고한 지지를 확인하고 샤로 선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놀랍게도 과거 나르세스의 즉위를 방해했던 사제 카르티르도 이때 나르세스를 지지했다. 당시 상황과 지지자 명단은 파이쿨리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에는 변경 지역의 왕들이 다수 포함된 반면, 케르만, 메르브, 길란, 메산과 같은 중요 지역의 귀족이나 카렌, 수렌과 같은 명문 귀족 가문, 왕자들의 이름은 거의 없어 나르세스의 지지 기반이 변경 지역에 집중되었음을 시사한다.

유혈 사태를 피하고자 나르세스는 바흐람 3세와 와남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바흐람 3세 측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면서 결국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전투 기록 없이 바흐람 3세는 재위 4개월 만에 폐위되었고, 목숨은 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르세스가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에 입성한 후 와남은 처형되었다.

나르세스는 자신의 즉위가 찬탈이 아닌 합법적인 계승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초대 샤 아르다시르 1세 이래의 전통인 왕실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귀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나르세스는 "신의 도움과 우리 아버지와 조상들의 이름으로 우리 아버지와 조상들의 왕좌에 오르겠다"고 선언하며 정통성을 확보했다. 파이쿨리 비문은 이러한 나르세스의 즉위 과정을 설명하는 유일한 자료로, 당시 사산 제국의 정치 상황과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비문은 파르티아어와 중세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으며, 이는 사산 왕조 초기까지 파르티아 제국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4. 로마와의 전쟁

나르세스 1세는 즉위 후 사산 제국의 오랜 목표였던, 로마 제국에게 빼앗긴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영토의 탈환을 시도했다. 당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제(카이사르) 갈레리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296년,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던 티리다테스 3세를 왕위에서 축출하며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로마는 297년 갈레리우스를 파견하여 반격에 나섰다. 갈레리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으나 초기 전투에서는 나르세스에게 패배하여 시리아로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298년 아르메니아를 통해 다시 공격을 감행했고, 사탈라 전투에서 나르세스의 군대를 기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나르세스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함한 왕족과 막대한 보물이 로마군에게 사로잡혔다. 로마군은 여세를 몰아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까지 위협했으며, 티리다테스 3세는 다시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귀했다.

결국 나르세스는 로마에 평화를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299년경 체결된 니시비스 조약을 통해 나르세스는 티그리스강 너머의 5개 속주를 로마에 할양하고,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는 등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조약으로 로마와 사산 제국 사이에는 약 40년간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나르세스는 전쟁 패배와 영토 상실의 책임을 지고 303년경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거나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4. 1. 전쟁의 배경

사산 제국의 초기 군주들인 아르다시르 1세샤푸르 1세는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로마는 240년대와 250년대에 걸쳐 메소포타미아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영토를 상실하고 영향력이 약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변화가 로마가 사산 제국에 대해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나르세스 1세가 즉위할 무렵 메소포타미아 동부(244년 이후)와 아르메니아 전체(252년 이후)는 이미 사산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아르메니아 서부가 아르사케스 왕자 티리다테스 3세에게 주어졌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의문시되고 있다. 역사가 우르술라 베버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전체가 3세기 동안 사산 제국의 일부로 유지되다가 298년 또는 299년에 체결된 니시비스 조약을 통해 로마에 양도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나르세스 자신은 파이쿨리 비문을 통해 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던 것으로 보이지만("그리고 카이사르와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감사(?)와 평화, 우정을 보냈다."),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두 제국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고 결국 296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4. 2. 전쟁의 경과

나르세스는 즉위 후, 로마 제국에게 빼앗긴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당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제(카이사르)인 갈레리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곧이어 8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296년, 페르시아군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티리다테스 3세를 왕위에서 몰아냈다. 이에 로마는 297년 티리다테스 3세를 돕기 위해 갈레리우스를 파견했다. 갈레리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으나, 세 차례의 전투 끝에 칼리니쿰 전투에서 나르세스에게 크게 패배하고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후퇴해야 했다. 안티오크에서 장인인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패배를 질책받은 갈레리우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297년 겨울 동안 군대를 재정비했다. 그는 2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갈레리우스테살로니키 갈레리우스 개선문에서 나르세스를 공격하는 모습의 세부 묘사, 그리스.


298년,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원을 받은 갈레리우스는 사탈라 전투에서 나르세스의 군대를 기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나르세스는 급히 도망쳤으나, 그의 아내, 자매, 자녀들, 그리고 막대한 군자금이 로마군에게 사로잡혔다. 로마는 이 승리로 메소포타미아 동부를 되찾았고, 티리다테스 3세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복위했다. 나르세스는 초기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 크테시폰마저 로마군에게 함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thumb

궁지에 몰린 나르세스는 로마와 평화를 모색하며 특사 아프라반(Aphraban)을 갈레리우스에게 보냈다. 아프라반은 나르세스가 로마 황제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사로잡힌 가족들의 송환을 간청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온 인류는 로마와 페르시아 왕국이 두 개의 위대한 천체와 같고, 마치 사람의 두 눈처럼 서로를 장식하고 빛나게 해야 하며, 격노의 극단에서 서로의 파괴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나르세는 다른 페르시아 왕들보다 약한 군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를 정복했지만, 당신은 모든 다른 군주들을 능가합니다. ... 나의 주군이 저에게 내린 명령은 페르시아의 모든 권리를 로마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 저는 제 주군을 대신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돌려줄 것을 간청할 뿐입니다."


갈레리우스는 처음에는 확답을 피하며 과거 페르시아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학대한 것을 비난했지만, 이후 니시비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만나 평화 조건을 논의했다. 결국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니시비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티그리스강 너머의 다섯 개 주를 로마에 할양한다. (기록에 따라 주의 명칭에 차이가 있다.)

니시비스 조약에 따라 로마에 할양된 티그리스 강 너머 5개 주
기록 1기록 2
잉길레네아르자네네
소페네목소에네
아르자네네자브디케네
코르두엔레히메네
자브디케네코르두엔


  •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를 메디아의 진타 요새까지 확장한다.
  • 페르시아는 이베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공식적인 교섭은 니시비스에서만 진행한다.


이 조약은 사산 제국에게 매우 굴욕적인 내용이었으며, 이후 약 40년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나르세스는 이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03년에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4. 3. 평화 협상

298년 사탈라 전투에서 갈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크게 패배한 나르세스 1세는 급히 도망쳐야 했고, 그의 아내, 누이, 자녀들 및 막대한 군자금까지 로마군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다. 동부 메소포타미아는 로마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티리다테스 3세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군주로 복위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나르세스 1세는 로마와의 평화를 모색하며 특사 아프라반(Aphraban)을 갈레리우스에게 보냈다. 아프라반은 나르세스 1세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로마와 페르시아의 공존 필요성을 강조하고, 포로로 잡힌 왕족들의 반환을 간청했다. 아프라반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온 인류는 로마와 페르시아 왕국이 두 개의 위대한 천체와 같고, 마치 사람의 두 눈처럼 서로를 장식하고 빛나게 해야 하며, 격노의 극단에서 서로의 파괴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경솔함과 나약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르세는 다른 페르시아 왕들보다 약한 군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를 정복했지만, 당신은 모든 다른 군주들을 능가합니다... 나의 주군이 저에게 내린 명령은 페르시아의 모든 권리를 로마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저는 제 주군을 대신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돌려줄 것을 간청할 뿐입니다... 그는 여기서 당신이 운명의 변화와 모든 인간사의 불안정성을 명심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아프라반에게 확답을 주지 않고 돌려보냈으며, 과거 사산 왕조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학대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란을 비난했다. 이후 갈레리우스는 니시비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합류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설득하여 이란 측에 평화 조건을 제시하도록 했다. 마침내 양측은 평화 조건에 합의하여 니시비스 조약을 체결했다.

니시비스 조약 (299년 추정) 주요 내용
조항내용
영토 할양티그리스 강 서쪽의 5개 주(잉길레네, 소페네, 아르자네네, 코르두엔, 자브디케네 또는 목소에네, 레히메네)를 로마에 양도
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를 메디아의 진타 요새까지 확장하고 로마의 영향력 인정
이베리아사산 왕조는 이베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 포기
외교 창구양 제국 간 공식 교섭은 니시비스에서 진행



이 조약은 사산 왕조에게 매우 굴욕적인 내용이었으며, 로마 제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큰 손실을 입었음을 의미했다. 이 조약 체결 이후 약 40년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나르세스 1세는 이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03년경 사망하거나 혹은 생전에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5. 종교 정책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나르세스는 불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그가 정통 조로아스터교 신자는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1] 또한, 마니교에 대해서는 로마 제국 내 마니교 신자들의 지원을 얻으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바흐람 1세와 같은 강경한 탄압은 피했다.[1] 이는 샤푸르 1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의식한 행보였을 가능성이 있다.[1]

나르세스의 통치 말기인 301년,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2] 이후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과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2] 이러한 변화는 사산 왕조를 외교적으로 다소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

6. 통치 및 유산

나르세스는 "고귀한 마즈다 숭배자"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샤푸르 1세의 막내아들이었음에도 사카, 신드, 투란 등 광대한 동부 지역의 총독을 역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형 바흐람 1세바흐람 2세의 치세 동안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지만, 아르메니아 총독을 지내며 "아르미난 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등 잠재적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바흐람 2세 치세에는 사산 군주에게만 허용된 화폐 발행권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름과 초상을 새긴 화폐를 독자적으로 발행하며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293년 바흐람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바흐람 3세가 파르스에서 와남 등 일부 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자, 다른 귀족들은 나르세스를 더 강력한 지도자로 보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정했다.[1][2] 나르세스는 귀족들의 요청으로 메소포타미아로 소환되었고, 가르메칸 지방의 파이쿨리 통로에서 그들을 만나 확고한 지지를 얻으며 샤로 선포되었다. 당시 나르세스를 지지한 귀족 중에는 과거 그의 즉위를 반대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수석 사제 카르티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르세스는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바흐람 3세와 와남에게 평화를 제안했고, 결국 큰 충돌 없이 크테시폰에 입성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귀족들을 소집하여 왕실 국민 투표를 실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합법적인 통치자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thumb의 파이쿨리 탑 폐허. 이 비문은 나르세스의 즉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위 후 나르세스는 로마 제국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제 갈레리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296년, 페르시아군은 아르메니아에서 친로마 성향의 티리다테스 3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로마는 297년 갈레리우스를 파견했지만, 그는 초기 세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2만 5천 명의 군대를 다시 모아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르세스의 군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복했다. 결국 나르세스는 수도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후궁과 왕족들이 로마군의 인질로 잡히는 치욕을 겪었다. 티리다테스 3세는 다시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귀했다. 로마는 니시비스를 경계로 하는 영토 조정을 제안했고, 나르세스는 이를 받아들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이후 약 40년간 사산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나르세스는 자신의 통치와 즉위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파이쿨리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은 중세 페르시아어와 파르티아어로 작성되었으며, 사산 왕조 초기 기록에서 파르티아어가 사용된 마지막 사례이다. 비문 내용은 바흐람 3세의 짧은 통치와 나르세스의 즉위 과정, 그리고 당시 사산 제국의 정치 구조와 귀족 세력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비문에 따르면 사산 제국의 초기 조직은 전신인 파르티아 제국과 유사하게, 샤한샤(왕중왕) 아래 여러 하위 왕들이 존재하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르세스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하고 나크셰 로스탐에 암벽 부조를 새기기도 했다.

주요 영토였던 아르메니아를 로마에 빼앗긴 후, 나르세스는 생전에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6. 1. 주화

나르세가 자신의 주화에 새긴 칭호는 일반적으로 "마즈다를 숭배하는, 신성한 나르세, 이란(인)과 비(非)이란(인)의 왕중왕, 그 영상/광채가 신들로부터 온 자"였다. 나르세 주화의 도상은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각각 다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야자 잎 장식이 있는 왕관을 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또 다른 머리 모양과 함께 금속판으로 만든 왕관(판갑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6. 2. 암벽 부조

나르세는 이란의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 재위)와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6-465년 재위)의 매장지 사이에 있는 나크셰 로스탐에 암벽 부조를 새겼다. 부조는 나르세가 판금관을 쓰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왕권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다. 나르세는 여성 형상으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반지를 받고 있는데, 이 여성은 흔히 여신 아나히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여성이 그의 왕비 사푸르두크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르세 뒤에 서 있는 인물은 사산 왕조의 후계자들이 일반적으로 착용했던 동물 전신상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어, 왕세자 호르미즈드일 가능성이 크다.

7. 평가

나르세스 1세는 선대 샤 바흐람 2세 사후의 혼란기에 조카인 바흐람 3세를 몰아내고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집권했다. 이는 정변의 성격을 띠었으나, 나르세스는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고 파이쿨리 비문에 기록된 것처럼 왕실 국민 투표 형식을 빌려 자신의 즉위가 합법적임을 강조하며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1][2] 그는 자신을 조로아스터교의 옹호자이자 제국의 번영을 가져올 인물로 내세웠으며, 초기 사산 왕조의 혈통이라는 점도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대외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빼앗긴 영토, 특히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탈환을 목표로 삼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갈레리우스가 통치하던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296년 아르메니아에서 티리다테스 3세를 몰아내는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97년 이후 갈레리우스가 반격에 나서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에서 로마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수도 크테시폰마저 함락당했으며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인질로 잡히는 굴욕을 겪었다. 이 패배의 결과로 니시비스를 경계로 하는 조약이 체결되어 메소포타미아 동부와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조약 이후 약 40년간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이는 사산 왕조에게는 불리한 상황에서의 안정이었다. 결국 나르세스는 자신의 주요 기반이었던 아르메니아를 되찾지 못한 채 생전에 왕위를 호르미즈드 2세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종교 정책 면에서는 타바리의 기록을 통해 그가 불의 사원을 방문하지 않는 등 정통 조로아스터교 신앙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대신 마니교에 대해서는 바흐람 1세와 달리 탄압하지 않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로마 제국 내 마니교도의 지원을 얻으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샤푸르 1세 시대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의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종합적으로 나르세스 1세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군사적,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려 노력했으며 종교적으로는 관용 정책을 펼쳐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기인 301년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이후 312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로마-아르메니아 동맹이 강화되자 사산 왕조는 지정학적으로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왔으나 장기적으로는 사산 왕조의 위상 약화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조

[1] 서적 Henning
[2] 서적 Neus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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